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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커피는 대체로 진하고 쓰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부분의 파리지앵이 공감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는 커피에 대한 프랑스의 관대한 정책을 들 수 있다.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으로 커피 수급이 불안정하자, 대체 커피로 볶은 치커리가 등장한다. 치커리 뿌리를 볶아 커피와 비슷한 맛을 내는 이 음료는 한동안 파리지앵의 입맛을 사로잡는데,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맛의 로부스타 종을 선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영국에서는 품질에 엄격한 기준을 둔 반면, 프랑스는 커피에 첨가물을 넣는일게 큰 거부감이 없었다. 이후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로부스타 커피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고, 이후에도 치커리 혹은 로부스타와 비슷한 맛을 내는 강하고 쓴맛의 커피가 대중적인 선호를 얻게 된다. 애초에 프랑스 사람들은 카페를 커피를 파는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카페는 사람을 만나는 공간이며, 그곳에서는 대화를 두거나 체스를 두는 일이 일상이다. 그러니 그곳에는 쓰디쓴 커피가 있을 수도 있고 심지어 와인이 있어도 좋다. 또, 카페는 사유의 공간이다. '레되마고(Les Deux Magots)'나 '카페 드 플로르 (Cafe de Flore)'를 찾았던 사상가와 문학가, 예술가들의 뒤를 좆아 지금도 파리지앵들이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 오래된 카페에서는 실제로 역사의 어떤 모습을 만날 수 있는데, 가령 '라 팔레트(La Palette)'에는 피카소의 손녀가 종종 들려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토불이 프랑스인들에게 장인정신을 품은 오랜 역사의 와인과 치즈가 있으니, 타국에서 재배된 커피는 그다지 중요한 작물이 아니다. 이 밖에도 프랑스다운 음식과 음료가 차고 넘치니, 그들의 테이블에서 더 맛있는 커피를 찾는 일은 부차적인 일에 불과했다. 파리지앵과 다름없이 관광객들도 보다 프랑스적인 것을 찾기만 하니, 프랑스에서 스페셜티커피가 꽃을 피우는 일은 요원했다. 프랑스에서 스페셜티커피산업이 꽃을 피운것은 2010년을 전후해서다. 초장기에는 미국과 영국, 북유럽의 커피를 사용하는 매장이 파리 곳곳에 문을 열었는데, 그곳에는 각각 프랑스에사는 미국인과 영국인, 북유럽 사람들만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셜티커피가 가진 재료에 대한 자부심,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온 인터네셔널 파리지앵들의 선호로 스페셜티커피 산업도 스멀스멀 그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각 카페에선 와인처럼 커피의 등급을 나누어 설명한다든지, 와인의 블렌드에서 영감을 받은 블렌드 원두를 선보인다든지, 아무리 작은 카페라도 테라스 자리를 마련해 야외 좌석에 대한 파리지앵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등의 구애 작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꽃을 피우려던 파리의 스페셜티 카페들은 펜데믹을 맞아 위축되는 듯 했지만, 오히려 환대의 문화에 마음을 빼앗긴 지역 사람들이 단골이 되었다. 아직도 그 성장세는 다른 유럽 국가나 아시아, 미국에 비하면 가파르지 못하지만, 그들만의 유구한 제빵과 미식의 역사를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다. 회사가 있는 양재동 인근에 프랑스의 스페셜티커피 브랜드 '테르 드 카페'의 매장이 문을 열어 몇 차례 방문했다. 방문후 프랑스의 스페셜티커피 문화에 궁금증이 생겼는데, 마침 책장에는 매 순간 어떤 지역의 커피 역사와 문화를 가장 잘 전해주는 잡지 '드리프트'가 꽂혀있었다. 바쁘다고 읽기를 미루던 '파리' 편의 책장을 넘기니, 금세 파리 시내 한복판에 날아간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는 나도 서울의 커피 씬을 이렇게 아름답게 정리하는 콘텐츠를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을 품었다. 일상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오늘 하루를 이겨내는 와중에, 커피 한 잔이, 잡지에 실린 글과 사진이 마음에 큰 위로를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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